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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tv문학관 사평역>
뜨락에 내려앉은 햇볕에 열기가 많이 사라졌다. 요맘때 흔들거리는 그림자를 볼 때면 가을의 정서를 느끼곤 한다. 예전의 사진첩 앨범이 이젠 디지털 사진으로 바뀌어서 하드란 이름으로 저장된다. 딱딱한 사각형의 물체 안에 수천 장의 사진이 들어가있다. 인간이 죽을 땐 빈손으로 간다지만, 추억은 가져갈 것이다. 그런데 그 추억이란 것이, 실은 예전에 경험했던 이야기로서가 아니라, 마치 어떤 '정서'들의 사진첩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 어디서 누구과 무슨 일이 있었다는 기억이 아니라, 냄새, 영상, 소리, 온도, 계절이나 시간대, 장소, 어떤 사물이나 사람이 있는 경우도 있고 대단히 복합적이다. 가령 최첨단 시설이 갖춰진 빌딩 안에서 시골생활을 경험한 적이 있는 나이드신 분에게 검정고무신 한짝을 건네면, 그는 주변 상황이 미묘한 조건을 충족할 경우 한순간 자신의 기억 속 정서들을 저장한 파일첩을 열고 그 검정고무신에 얽힌 '정서'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 정서가 뚜렷한 이야기로서 나오는 게 아니고, 느낌이라기엔 약한 표현인데, 인간의 오감 넘어 육감까지 다 합쳐져서 몸과 마음에 각인되어 있는 그 모든 복합적인 감각이 빚어낸 다차원적인 그 무엇이다. 이런 정서를 떠오르게 하는 매개체는 사람마다 다르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고, 노인과 청년이 다를 것이고, 도시생활을 한 사람과 시골생활을 한 사람이 다를 것이고,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는지에 따라서도 다르다. 컴퓨터시대 전후로도 차이가 있을 것이며, 하는 일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다. 625직전에 태어난 사람들은 초콜릿이나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통조림 빈 캉통에 담긴 어떤 정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죽을 때까지 못잊는 것이다. 계절별로 자신만의 어떤 정서를 다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에서 느끼는 애잔함, 혹은 절벽에서 내려다보이는 파도, 냄비라면, 폐공장의 옥상, 어릴 적 뇌리에 각인되다시피 라디오에서 들었었던 핑크플로이드의 타임 베이스, 소낙비, 딱딱해져버린 크레파스 조각, 은하수 담배와 최루탄, 500cc 옛날 생맥과 막걸리, 여자의 귀밑머리, 니트옷, 그리고 기차역도 있다.

'사평역'은 겨울 눈이 펑펑 내리는 날 밤 기차역 대합실을 배경으로 인간군상들의 저마다의 사연을 그려낸 드라마이다. 이것은 본래 곽재구 시인의 시 '사평역에서'를 임철우 작가가 단편소설로 써내고, 다시 tv문학관에서 드라마화한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 속 기차역 대합실의 '정서'는 80년대 초, 완행열차 역이다. 완행열차란 지금은 지방의 일부 구간에서는 이용할지 모르겠는데, 장거리는 거의 사라지고 없다는 비둘기호를 말한다. 그건 마치 철로를 다니는 버스 같은 것이다. 역이란 역은 다 선다. 특히 겨울엔 난방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겨울밤을 기차에서 보낼 때는 엄청나게 춥다. 또 작은 역을 다니기 때문에 밤에는 생각지도 못할 엉뚱한 사건들이 벌어지기도 하는 곳이다. 간이역에서 파는 뜨끈한 가락국수도 별미다. 사평역은 완행열차역이고, 그리 크지 않은 대합실은 시골 정서를 담고 있다. 가운데 톱밥난로가 있고, 창밖에선 눈이 펑펑 내린다. 배는 고프고, 열차는 안오고, 시간은 더디간다. 삶이 버거운 사람들, 누군가 자극을 주면 애환 가득한 말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그 동안 아주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앉았을 때묻은 나무의자 한 귀퉁이에 모년 모월 모일 모시의 자신이 앉아있다는 생각이 들면, 보이지 않는 철로 끄트머리 너머까지 은하철도 999에서처럼 위로 말려올라가며 상념을 피워낸다.  

이 드라마 속 사평역은 전철역이 아니고, 실제 사평에는 역이 없다고 한다. 드라마의 뿌리가 된 곽재구 시인의 시는 드라마 속 한 인물이 직접 암송하기도 한다.
- 사평역에서 -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는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시 자체가 어떤 정서를 함유하고 있다. 그것은 어느 시골 작은 역 완행열차 대합실의 정서이고, 예전 우리나라 산업화시대의 정서다. 그 정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시나 소설, 드라마를 볼 때 단시간의 강렬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한다는 것을

지극히 소시민의 일상이다. 며칠 있으면 추석인데, 이 시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오늘도 그리 풍성하지 못한 한가위인가 보다. 요즘 시각으로 하면 솔직히 드라마가 재밌다고하기 어렵다. 또한 사람에 따라 평이 크게 갈릴 만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도 하다. 대합실은 사람이 머무는 곳이지만, 길게 뻗은 철로를 보는 것처럼 먼시간을 염두에 두고 보면, 괜찮아보인다. 고향에선 공장다닌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술집에 나가는 여성, 돈을 훔쳐 도망간 종업원을 찾아 나선 식당집 여주인, 감옥에서 출소한 남자, 대학에서 퇴학당한 남학생, 철도원, 봇집장수들. 그들의 각기 인물들의 사연이 드라마 중간중간에 짧막하게 등장한다. 그 시절의 애잔한 정서가 한 가득 담긴 작품이다.

세상에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게 있다고들 한다. 사랑이니 우정이니, 어렸을 때는 참 많이들 이야기했었다. 그러나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남은 건 또 앞으로 얻고 싶은 건 바로 이 정서들뿐이다. 어떤 사랑을 했는가를 알려면 어떤 정서가 자신의 뼛속 깊이 새겨졌는지를 확인하면 된다. 우정 또한 마찬가지. 희미하고 퇴색해버린 우정을 한탄한들 어쩔 것인가. 어리석게도. 그냥 혼자 다 마셔버릴 것을. 그건, 그 정서는 삶의 경험으로 얻은 것뿐만 아니라, 자신이 살면서 보고 듣고 피부로 느낀 그 무엇들이 복합적으로 형성된 것들이다. 이 정서들은 단지 막연하게 좋아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려서 주변 삶에 납치되다시피하여 강렬하게 각인되었거나 아주 진저리날 만큼 완벽하게 빠져들었거나 성인이 되어 지독하게 강렬한 느낌을 받아야만 하나하나 간신히 자신에게 새겨지는 것들이다. 원한다고 해서 다 얻을 수도 없는 것이고, 이 정서들이야 말로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대변할 수 있는 것들이다.

'사평역', 지금 보면 지루하고 재미없는 드라마였지만, 그 정서란 것에 대해 깊은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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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에어헌터
다시 네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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